* 하지만 정작 니체라면 대중의 현실이 되려고 하는 저 인간형을 가리켜 주관적 초인이 아니라 그저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이라고 했을 것이다.
* “거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 자, 새로운 자, 낯선 자에게 마음이 가는 모든 이들아. 너희는 참을성이 부족하구나.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다.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. 하지만 너희는 내실이 부족해서 기다리지도 못한다. 심지어 게으름을 부리지도 못하는구나!”
*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이상 할 수 없을 때 발발한다.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.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게만 가능한 것이다.
*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.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착취로까지 치닫는다.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.
* 걷기가 그저 하나의 선을 따라가는 직선적 운동이라면 장식적 동작들로 이루어진 춤은 성과의 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치이다.
* 머뭇버림은 긍정적 태도는 아니지만,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.
* 세계가 전반적으로 긍정화되는 추세 속에서 개인도 사회도 자폐적 성과기계로 변신한다.
* 한트케의 피로는 자아피로, 즉 탈진한 자아의 피로가 아니다. 한트케는 오히려 “우리-피로”라고 말한다. 이때 나는 너한테 지치는 게 아니라, 한트케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너를 향해 지치는 것이다. “그렇게 우리는 -내 기억으로는 늘 밖에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- 앉아있었고 말을 하기도 하고 침묵을 지키기도 하면서 공동의 피로를 즐겼다. … 피로의 구름이. 에테르 같은 피로가 당시 우리를 하나로 엮어 주고 있었다.”
* 한편 카프카는 치유적인 피로, 상처를 아물게 하는 피로를 상상한다. “신들은 지쳤고 독수리도 지쳤으며 상처도 지쳐서 저절로 아물었다.”
* 타자와의 관계가 사라지면서 보상의 위기가 찾아온다. 인정으로서의 보상은 타자 또는 제3자라는 심급을 전제한다. 스스로를 보상하거나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. … 보상구조에 이상이 생기면서 성과주체는 점점 더 많은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다.
* 슬픔은 강렬한 리비도가 투여된 대상의 상실과 함께 일어난다. 슬퍼하는 자는 전적으로 사랑하는 타자와 함께 있는 것이다.
* 성과주체는 가해자이자 희생자이며 주인이자 노예가 된다. 자유와 폭력이 하나가 된다. 자기 자신의 주권자, 호모 리베르를 자처하는 성과주체는 호모 사케르임이 밝혀진다.
올해의 문화충격. 작년엔 참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는데 올해 다시 책을 펴서는 이틀만에 독파. 그만큼 일년새에 더 피로해진 것 같아.
'영화와 책, 음악' 카테고리의 다른 글
보이후드 (Boyhood, 2014) (0) | 2015.02.19 |
---|---|
서칭 포 슈가맨 (Searching for Sugar Man, 2012) (0) | 2015.02.06 |
김애란, 서른, 비행운 (0) | 2014.12.28 |
미쓰 홍당무 (2008) (0) | 2014.12.23 |
죽은 시인의 사회 (Dead Poets Society, 1990) (0) | 2014.12.15 |