그 사이 언니에게도 몇줄로는 요약할 수 없는 시간들이 지나갔겠죠? 바람이 계절을 거둬가듯 세월이 언니로부터 앗아간 것들이 있을테죠? 단순히 ‘기회비용’이라고만 하기엔 아쉽게 놓쳐버려 아직도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도. 말해도 어쩔 수 없어 홀로 감당해야 할 비밀과 사연들도요.
…
저는 지난 10년간 여섯번의 이사를 하고, 열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,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. 다만 그랬을 뿐인데. 정말 그게 다인데.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.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.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, 사람을 믿지 못하고,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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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래도 누군가 그렇게 저한테 어려움없이 안기면 걔들과 결코 오래볼 사이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가슴 한쪽에 슬며시 온기가 퍼지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. 왜 물이 한가득 든 투명한 비커 안에 스포이트로 잉크를 한방울 떨어뜨리면 순식간에 아름다운 뭉게구름이 생기며 액체의 성질이 바뀌게 되잖아요? 그때 제 마음이 그랬던 것 같아요. 사람들의 작은 배려나 선의 하나에 쉽게 흔들리고 감동하고 저 역시 가능하면 조그마한 답례라도 하고 싶어졌으니까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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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런데 언니, 요즘 저는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.
'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……. 겨우 내가 되겠지.'
*
우울의 바다 제일 깊은 곳으로 나를 던져놓았으면서도, 왜인지 모르게 위안이 되었던 단편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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